"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한 말이다. 본래 한 몸이었던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관계의 단절은 끊어지기 전엔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온다. 언제든 만나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에 영원하고 견고한 벽이 세워진다는 것. 언제든 ‘함께’를 상상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 짧은 기간, 내가 갈갈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을 때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악의 방법까지도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지옥은 모든 관계로부터의 영원한 단절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확하고 정직하게 바라보자. 이것을 영원한 단절이라고 말한다면 영원의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다. 그저 믿음 없는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영원처럼 보일 뿐이다. 한 쪽이 지옥으로 내려가지 않는 한, 영원한 단절이란 없다. 이 슬픔 자체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슬픔이기는 하나 어딘가 과장되어 있다.
"차라리 격한 고뇌의 순간이 더 낫겠다. 그건 최소한 깔끔하고 정직하니까. 그러나 자기연민에 푹 잠겨 그 속을 헤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뒹구는 데서 오는 느끼하고 끈적끈적한 쾌락이라니. 구역질이 난다."
- C.S.루이스, 헤아려본 슬픔 중
내가 갈갈이 찢어지는 고통 외에도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울렁임, 뭔가가 가슴을 푹 누르듯 급하게 도망가는 숨, 배고픔에 가능한 많은 음식을 떠올려 봐도 찾아오는 메스꺼움. 이 육체적 감각은 지나치게 낯설다. 그리고 과거의 즐거움과 아쉬움을 반복해서 회상한다. 즐거움은 마치 현재의 즐거움인 것처럼, 아쉬움은 후회를 반영한 망상으로, 그 속에서 잠깐 즐겁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는 다시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 그 끔찍한 시간을 왜 그리워 하는걸까? 슬픔에 취하는게 좋아서? 그토록 슬픔에 젖는 내가 좋아서? 어처구니가 없다. 심지어 이 슬픔은 지금의 무기력한 모습에 대한 핑계로 삼기 딱 좋기까지 하다. 연인과의 이별이라니! 얼마나 적당한 핑계인지!
정직하자. 현재의 나는 그만큼 아프지 않다. 충분히 일상을 살아낼 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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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 minj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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